한국실업소프트테니스연맹

본문 바로가기


소프트테니스의 역사

소프트테니스의 역사

소프트테니스(정구)의 도입과 뿌리 형성기 1883년 - 1919년

본래 소프트테니스(정구)의 연원은 구미의 테니스에 있다.
그 연원을 보면 테니스의 도입부터 들어가야 한다. 소프트테니스(정구)의 처음 이름을 척구라고 하였다. 우리나라 처음 도입 시기는 많은 설이 있으나 그중에 개화기의 청년 정치가 김옥균 선생에 의하여 1883년 일본에서 도입되었다는 설에 따른다.
수신사 일행을 수행하여 도일한 선생은 개화 문명의 길을 걷고 있는 일본을 보고 경응의숙에서 복택유길(일본 정구의 창설자)와 탁지부(전 경제 기획원 자리)에 코트를 닦고 외교관들을 상대로 경기를 한 기록이 있다.
이때 이름을 척구라 하였다. 우리 고유의 척서라는 윷놀이에서 딴 '공던지기'라는 의미이다.

소프트테니스(정구)의 확대기 1920년 – 1930년

1905년 이후로 본격적으로 소프트테니스(정구)대회가 번성하게 된 이유는 개화의 욕구가 충만하였던 것이 스포츠에 표현이 되었던 것이다.
학교 제도의 확립으로 교사의 지도를 통한 보급이 중추가 되어 신문화의 일종으로 스포츠는 청년층에 환영을 받으며 전국 각지에 상당수 설립되었던 소ㆍ중학교나 전문학교가 모두 정구를 채택하였다.
또한, 1921년 10월 15일부터 17일까지 3일동안 동아일보 후원으로 반일적인 도시로 이름난 개성의 진성고진 코트장에서 우리 민족의 손으로 이룬 첫 대회인 전국여자정구대회(현재는 동아일보기)는 당시 경성 인구가 25만명 중 2만명이 관전하는 대성황의 경기를 치루며 소프트테니스(정구)가 전국적으로 확대되기 시작했다.

소프트테니스(정구)의 성숙기 1931년 – 1945년

많은 기관 사회 단체들의 영향으로 다시금 1933년에 조선연식정구연맹이 발족 되어 제1회 전조선연식정부선수권대회를 개최를 시작으로 많은 대회가 생겨 났으며 이듬해 8월 전일본 선발군이 내방하여 전경성군과 대전하여 우리나라가 우승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이어 1935년 10월 제 8회 메이지 신궁대회부터 제13회까지 우승하는 등 연 10년을 계속 제패하여 정구 주종국인 일본을 각성케하고 더불어 민족항일기의 암울한 시대에 일본의 땅에서 일본을 압도 조선인의 힘을 보여준 기회가 되어 우리 민족의 역량을 드높였다. 그러나, 1942년 일제의 ‘구경기폐지정책’으로 광복 때까지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소프트테니스(정구)의 성숙기 1931년 – 1945년

1948년 8월 정부수립으로 조선연식정구협회를 대한연식정구협회로 개칭하고, 1948년 9월에 대한체육회가 가맹을 하였다.
1953년 9월에 대한테니스협회와 완전분리하였고 1955년 7월 26일에 아시아정구연맹에 가입하였다. 아시아 연맹이 결성 후 2년 주기로 아시아정구대회를 개최하여 아시아 지역에 정구를 홍보, 보급 시키는데 비중을 두었다.
IOC와 함께 국제스포츠 양대 기구인 GAISF에 1933년 필란드에서 개최된 제27차 GAISF총회에서 정회원국으로 가입하여 소프트테니스(정구)가 국제무대에 본격적으로 활동하게 된 계기 되었다. 이후, 세계의 스포츠 연맹들과 교류를 통하여 정구를 홍보 및 국제화, 그리고 올림픽 종목 채택을 위하여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상단으로

한국실업소프트테니스연맹 (42988)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읍 현풍동로 170 달성종합스포츠파크(내) 소프트테니스장
회 장 : 최익원 / 전무이사 : 김경한(kkh9462@hanmail.net) / 총무이사 김태정(ktj1175@hanmail.net)

Copyright © DSWEB. All rights reserved.